■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제39대 회장 - 신년 특집 대담■ - 샘문뉴스, 샘문TV, 공동 취재팀 - 진행-이정록 발행인, 회장

[샘문뉴스]= 대망의 2024년 1월 3일 오후 5시 인사동 경북궁에서 <신년특집 대담>으로 샘문뉴스와 샘문TV 공동 취재로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제39대 회장>과 이정록 샘문뉴스, 샘문TV 발행인 겸 회장에 대담이 저녁만찬 연회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이 자리는 공광규 시인이 사단법인 샘문그룹(회장 이정록)에서 주최,주관한 제3회 한용운문학상 계관부문 대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초대한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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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미 문화부 기자
기사입력 2024-04-15 [18:36]

  © 신재미



    [샘문뉴스]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제39대 회장 - 신년 특집 대담■

 

▣샘문뉴스, 샘문TV, 공동 취재팀▣

 

▶진행 - 이정록 발행인, 회장

▶취재 - 신재미 문화부 기자

 

 

대망의 2024년 1월 3일 오후 5시 인사동 경북궁에서 <신년특집 대담>으로 샘문뉴스와 샘문TV 공동 취재로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제39대 회장>과 이정록 샘문뉴스, 샘문TV 발행인 겸 회장에 대담이 저녁만찬 연회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이 자리는 공광규 시인이 사단법인 샘문그룹(회장 이정록)에서 주최,주관한 제3회 한용운문학상 계관부문 대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초대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는 샘문그룹 이정록 이사장,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며 샘문그룹 고문이신 이근배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며 샘문그룹 고문이신 손해일 시인, 샘문그룹 고문이며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김유조 시인, 서수옥 샘문예술대학교 시낭송학과 지도교수, 샘문뉴스 문화부 기자이며 샘문그룹 부이사장 신재미 시인, 그리고 수상 기념으로 연회에 초대한 초대자 공광규 시인이다.

 

▲     ©이정록

 

저녁 만찬은 공광규 시인의 넉넉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한우 코스요리에 프랑스 현지에서나 맛볼 수 있는 금색 옷까지 입은 와인을 곁들여 대한민국 1번지 최고의 연회 식탁이 되었다. 식사시간 내내 웃음과 덕담, 사랑으로 오고 간 대화가 행복을 한아름 안겨 주었으며, 자연스럽게 문학이 화두가 되었다. 서수옥 시낭송가 가 시 한편을 낭송하겠다고 일어섰다. 핸드폰을 열고 배경음악을 켠 후 이근배 시인의 <겨울행>을 낭송했다. 시를 지은 이근배 시인은 눈을 감고 음미하더니 힘찬 박수로 답례를 했다.

 

잠시 후 이근배 시인이 시낭송 베틀로 자작시 <겨울행>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낭송 중간 중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오랜 세월 시를 쓰고 낭송하신 분이라 행과 연을 구분하면서도 시어 전달이 분명하여 듣는 이가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보고 있는 듯 형상화 된 착각을 하도록 낭송을 해나가셨다.

  

겨울행

 

       이근배

 

대낮의 풍설(風雪)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 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당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 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雪害木) 쓰러진 자리

생솔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 발이 걸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     ©이정록

 

시 낭송을 마친 후, 이근배 시인은 말했다. 옛 사람들은 시를 지으면 낭창을 하거나 시를 지인과 함께 음미하고 읽는 방법으로 서로의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것이 낭송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풍류가 있고 시를 나누는 방법이 지금보다는 상당히 앞섰던 것으로 기억된다며, 요즈음 대부분 시낭송가들이 낭송을 통해서 시 보급을 잘해주고 있어 고맙다. 그러나 근래 일부 낭송가들의 시낭송 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부분도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시를 잘 전달하겠다는 모습보다는 지나치게 화려한 치장을 하고, 낭송에선 시가 전하고자 하는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화가 시낭송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지용 시인과 관련 된 대화로 깊어졌다전 소년한국일보 편집국장 김수남을 언급 후, 시낭송 이야기를 이어갔다. 짝수 달 24일 시낭송의 날이라고 정한 후 매달 시낭송을 했다. <백상기념관> 아래 식당에서 낭송을 하는데 당시 유명인들이 다수 참여했다고 한다시 낭송 후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는 다시 문학의 씨앗을 잉태하는 삶이 되었다당시 정권은 지금 하고는 많이 달랐다. 작가들도 월북 작가이니 좌파 작가니 하는 것이 분류가 되어 시달리기도 했다. 납북이나 월북한 사람은 이름조차 부를 수 없던 시절이니 정지용 시인은 이름도 부를 수 없어. 이름을 부른다고 할 것 같으면 정00 이렇게 불렀다.

 

515일 날이 정지용 생신 날이다. 시인 몇 명이 모여 생신을 앞두고 제1의 <지용회>을 하자는 의견이 오고 간 후, 515일 지용회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지용 시집 한 권을 다 외웠으니까 지용을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생략···,) 내가 20여 년 지용회 회장을 했다.

 

[해설]= 자연스럽게 문학 이야기가 꽃을 피우자 이정록 샘문뉴스 및 샘문TV 발행인 겸 회장이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오늘 이근배 회장님의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인생에 깃든 문단의 역사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야 되겠다며 신년특집 방송 특별취재로 정식 인터뷰를 요청하자 이근배 회장님께서는 쾨해 승낙을 하셨다. 진행은 이정록 샘문그룹 이사장이 맡았다.

 

안녕하세요. 지금부터는 분위기를 바꾸어 대한민국 문단의 최고의 거장이시며, 문학의 대통령이신 대한민국예술원 제35대 회장이시며 샘문 그룹 고문이신 이근배 회장님과 역사적인 신년특집 특별대담 인터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정록 - 2019년 12월경에 회장님이 제39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으로 취임하시는 날 취임식에 저 이정록을 초대하셔서 화환을 보내드리고 참석하였는데 취임식장에서 살펴보니 미술분과, 음악분과 등 다른 분과에서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는데 문학분과에서는 저 혼자만 참석한 것 같아서 약간 당황하였는데 저 혼자만 초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이근배 - 다른 이유는 없고 조촐한 취임식을 하고 싶어서 초대들을 안 했고 이정록 회장 한 사람만 초대를 했지요. 참석해줘서 감사했어요. 

 

이정록 그러셨군요 초대 해주셔서 영광스러웠고 감사했습니다.

 

이정록 다음은 회장님의 서울 상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근배 - , 내 인생은 그야말로 전설이었지당진 촌놈이 서울로 올라와 생면부지의 세계에서 신화를 썼으니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어요.

 

[해설]= 이근배 시인은 첫마디부터 모인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숨소리까지 죽이고 경청한 다음 말씀을 들어본다.

 

이근배 - 현대그룹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의 말 '해 보기는 했어라는 어록은 불가능한 일도 현실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 내게 했듯이, 당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상경한 촌사람이 출판사에 취직하여 잘 알지 못하던 이영도 시인에게 원고를 받아 출판을 했고, 이어령 평론가도 만나서 원고를 받아 출판을 하게 되었고, 일식면도 없던 김광주 작가에게 비호飛虎』를 받아 기적을 만들어 냈지. 젊음과 열정은 곧 이근배 라는 전설의 인물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지당시 나는 김광주 작가를 알지 못했는데 비호飛虎』 받아 출판하게 되었어요. 서정주 시인도 알고, 김동리 소설가도 알고, 이어령 평론가도 어디선가 읽고 나에게 원고를 주었지만, 김광주 작가는 전혀 몰랐는데 원고를 받게 된 겁니다.

 

이정록 첫 인사부터 명사들이 많이 등장하시는 군요

 

이근배 아 그런가요. 조병화 시인께서는 날 좋아하고 있었어요. 내가 시를 쓰면 오장환의 병든 서울보다 네 시가 더 좋다 그러면서 나를 칭찬해 주셨거든요무교동에 가면 <낭만>이라는 술집이 있는데 그곳에서 조병화 시인이 김광주 작가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노랫말을 쓴 유호 작사가와 자주 만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느 날 낭만 술집에 들렀는 데 조병화 시인이 웨이터를 불러 근배에게 맥주 세 병 갖다 줘라해서 인사를 하게 되었어요

 

회장님께서는 예의 바르고 품행이 단정 하셨나 봅니다.

 

이근배 -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어린 시절 습관이 몸에 밴 것인지 어른들께 버르장머리가 좀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김동리 선생, 서정주 선생, 조병화 선생께도 버르장머리가 좀 없었어요. 그래서 겁도 없이 조병화 선생한테 선생님, 김광주 선생님 하고 차 한 잔만 하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라고 말을 했더니 쾌히 승낙 하셨어요. 당시 고은아 언니가 무교동에서 금문다방을 하고 있었어요. 1966년 봄 <금문다방>에서 조병화 시인과 함께 김광주 작가를 만났어요. 그때 내가 서른 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이정록 서른 살에 대한민국의 중심에서 활동을 하셨군요회장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계속하시지요.

 

이근배 첫 시작을 서울 중심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젊기도 하지만 용기도 있었나 봅니다. 삼성출판사 김봉규 사장은 빌딩도 소유하고 지프 차를 타고 다니는데, 나는 책 한권 나오지 않은 동화출판공사 주간으로 있던 때인데 사정을 했지요. 선생님! 삼성출판사는 돈 많은데 왜 거기 주시지 말고 젊은 사람들에게 맡겨 주세요. 하니까 조병화 선생도 옆에서 거들어 주셨어요김광주 선생도 날 거들어 주시느라 그러시는 거야. '지금 말이야 김봉규가 엄청난 돈으로 내 뺨을 때리는데......, 그래도 근배 줘야지' 하시면서 원고를 나에게 준 겁니다내가 그분을 처음 뵌 날인데 근배 줄게그 말을 듣고 사무실로 달려가서 임인규 사장에게 빨리 계약금을 마련해오라고 했지. 당시는 핸드폰이 없을 시절이니까 너무 기뻐서 날아간다는 말이 맞을 거야.

 

이정록 - 조병화 선생께서 회장님을 무척 아끼셨나 봅니다. 그래서 원고 출판은 하게 되었나요?

 

이근배 - 김광주 작가는 나에게 원고를 주기 위해 민중서관에 가서 원고에 교정 볼 데가 있다며 스크랩북을 끼고 비호처럼 날아와서 나에게 맡겼을 때,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호』 가 다섯 권으로 된 전집이 되었고, 출판을 했는데 그야말로 비호같이 나가는 거야.

 

이정록 비호 라는 책 이름이 좋습니다. 이름처럼 이라면 책이 잘 팔렸을 것 같습니다.

 

이근배 - 그럼요. 엄청 팔렸어요. 그것도 몇 만 부 나가는데 1~ 2년이 아니라 두 달 만에 나갔으니 출판계에 불이 났지. 내가 임인규 사장과 제본소에 가서 책 만드는 것을 독촉하고 있으면, 외판업자들이 번호표 들고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책을 미쳐 만들지 못해서 못 파는 일이 일어났으니 해외 토픽 감이었지

 

이정록 문학계에 전설을 쓰셨다는 말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소문으로만 듣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책 몇 권 옆구리에 끼고 무교동을 뛰어가는 회장님 모습이 얼비칩니다,

 

이근배 이런 일도 있었어요. 삼성출판사 김봉규 사장은 5,000세트, 25,000권을 수표로 사갔어요. 출판사 영업직원들 한테 우리 출판사가 비호만들 것이라고 했는데 다른 곳에서 출판이 되었으니 자존심도 상하지만 삼성직원들도 영업을 해야 월급을 줄 수 있으니 이 책을 사서 되팔게 해 주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거지요.

 

이정록 떼부자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군요. 회장님은 시도 잘 쓰시지만 삶도 엄청 열정적이었다는 것이 생활 속에 고스란히 깃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근배 시인 그 말은 과찬이고요. 한 가지 더 말씀 드린다면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에 된 사연입니다그렇게 비호』 가 잘 팔려 나가니 이번에는 세계문학전집을 냈어요. 그것도 불티나게 팔려 나가니, 이어령 선생 전집도 만들게 되었어요. 만드는 책마다 히트가 되니 내 명성이 높아 질 수밖에, 내 한 달 월급이 10만 원도 안 할 때인데 열 배도 넘는 인세를 챙겨드렸으니 놀라운 시절이었지요. 그야말로 지금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전설을 그시절에 쓴 거지요.

 

이정록 정말 회장님은 문학 역사의 거장으로 왜 예술원 회장까지 오르셨는지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책만 만들었다 하면 새 역사를 쓰셨군요. 계속 하시지요.

 

이근배 이어령 선생님 말인데요. 평창동에 집을 지으셨을 때, 임인규 사장과 김봉규 사장 그리고 나를 초청하시고는 당신들 세 사람이 이 집을 사게 해줬다고 감사하다고 했어요. 선생이 돌아 가셨을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장관으로 계실 때 비서였던 신현웅 웅진문화재단 이사장에게 얘기해서 <문광부장>으로 치른 것도 그런 인연 덕분이었지요.

 

이정록 그 어르신과도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으시군요.

 

이근배 그렇다고 봐야지요. 이어령 선생은 잡지 '한국문학'과 연결됩니다. 1970년에 독서신문이 창간된 뒤, 김봉규 사장이 홍보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양강의를 했는데 강사는 이어령 선생과 안병욱 선생이었어요. 강의를 다녀온 이어령 선생이 '이근배씨 잡지하자, 책 만들면 되겠어' 하시더라고요. 강의 다녀온 이야기를 하시며 '인산인해야 미당과 최인훈과 광주에 강연하러 갔는데 광주 사람만 온 게 아니라 전라도 각처에서 강연 들으러 오더라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잡지라는 게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그게 한국문학 인가요? 그래서요?

 

이근배 그렇죠. 이어령 선생은 등록만 해 주면 자기가 하겠다고 그랬어요. 잡지 이름을 뭐냐고 했더니 '문학과 사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는 빼자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러면 뭐라고 했으면 좋겠냐고 묻기에 <문학사상>이라고 했더니, 이어령 선생은 좋다 하시면서 문학사상으로 결정했어요.

 

이정록 회장님은 쉽게 책을 얻으신 거네요.

 

이근배 - 아니 그렇지 않아요. 당시 윤주영 문공부장관과 친하니까 곧 등록증이 나올 것이라고 하더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등록증이 안 나왔어요. <사상>에다 <문학>까지 붙었으니까 나올 리가 없었던 거지요.

 

이정록 아니 왜 출판이나 잡지등록증이 나오지 않았던 거지요?

 

이근배 - 당시는 문학 가운데 어떤 것들은 골칫거리였던 거지요. 조세희 소설가가 202212월 사망했지만, 사상계때문에, 19705월호에 김지하의 <오적>을 싣고 폐간됐으니까요. 자유당과 공화당은 사상계때문에 사상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이정록 그 시절에는 국가와 사회, 문학 사이에 골이 깊었다고 봐야 하는 것인지요?

 

이근배 보수와 진보의 성향 대립이 만만하지는 않았어요. 이어령 선생이 훗날 문화부장관도 하고 그래서 지금은 보수라 생각하지만, 당시는 이어령을 어떻게 믿겠어요. 남정현의 <분지> 사건 때 증언도 하고, 첫 번째 평론집이 저항의 문학』 인데, 사상도 겁나는데 문학까지 붙였으니 장관도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믿고 등록증을 내 주겠어요

 

이정록 그래서 어려움을 겪으셨군요. 하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 되면 자만하여 옆도 앞도 안 보일 겁니다. 그래도 지혜로운신 회장님 이시니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내셨나 궁금해집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이근배 - 김종필 씨가 국무총리를 할 때였어요. 1967년 갑자기 정계 은퇴를 해서 호외가 나오던 날인데 내가 청구동으로 갔어요. 낙백落魄 시절에도 몇 번 갔었습니다. 전예용 씨라고 JP(김종필)가 따르는 분이 계셨는데, 내가 그분께 말했어요문학사상』 은 사상과는 아무 관계없는 <순수문학지>라고, 그 말은 믿은 그 분이 JP에게 말을 해 줘서 등록증이 바로 나왔어요.

 

이정록- 이 대목에서는 그냥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우리 다 같이 박수를 칩시다.

 

이근배 – 무슨 박수를 치고 그러세요 쑥스럽게,

 

이정록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을 해결하셔서 책이 발간되게 되었다는데 당연히 존경의 마음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이근배 - 그 후, 편집장을 구해 달라고 말하기에 김승옥 소설가를 추천했더니 좋다고 했어요. 김승옥 소설가는 그때 샘터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어요. 김재순과 계약을 한 것이 2년 동안 못 나온다고 해서 홍기삼을 추천했어요. 홍기삼 평론가는 당시 예총 기획실장을 그만두고 안동에 내려가 있었던 터라 문학사상첫 편집장을 홍기삼 평론가가 맡았어요.

 

이정록 – 교양지 샘터사 이름을 들으니 옛 생각이 납니다. 과거 한 때는 가판대에 신문과 책을 놓고 팔 때에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사는 게 샘터사 교양지였는데 그 당시는 청소년들에게 참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제가 2010년에 저의 필명을 근간으로 창간한 문예지 샘터문학과 같은 샘터 명사를 사용한 것이였지요.

  

이근배 맞아요. 문예지가 아니지요. 손바닥만한 크기에 교양지였어요. 비슷한 크기에 교양지로 시조사,다이제스트가 있었지요. 그 시절 거리의 풍경이 영화처럼 스쳐 가네요. 그 시절에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책을 읽고 또 읽고,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읽던 교양지 책인데 요즈음은 지하철을 타면 책 읽는 사람 보기가 어려워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갈게요.

 

  © 이정록

 

▲ 이근배 – 그 뒤 이어령 선생은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문학사상』 을 가져가라고 했어요. 1975년 잡지를 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유주현 선생이 찾아왔어요한국문학』 을 인수하면 어떻겠냐는 거예요내가 임인규 사장에게 일언반구도 얘기 안 했어요이어령 선생도 문학사상』 을 가져가라는데 못 가져오는데 한국문학』 을 가져올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인규 사장이 어디 갔다 오더니, 김동리 선생 한국문학』 이 어렵다고 하더라 그러더군요. <휘문출판사> 주간을 하고 있는 최근덕 말에 의하면 한 달에 30만 원씩 밑진다는데 우리가 가져올 거 없이 30만 원씩 보내 드리면 안 되냐는 거였어요.

 

이정록 – 그시절 30만원씩 돕는 다는 것은 쉽지 않던 시절일 텐데요. 당시 대기업의 임원 한 달 월급이 그 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근배 이정록 이사장 말이 맞아요. 그 당시 30만원의 가치는 쾌 큰 거였지요임인규는 김동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나는 김동리 선생하고 사제지간이니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나는 앞에 나서지 않았어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리 선생한테 전화가 왔어요. 사장한테, 한국문학 작가상에 상금이 없으니 상금 좀 말해 달라는 거예요다른 때 같으면 선생님 우리도 좀 어렵고 제가 그런 얘기를 어떻게 말을 해요라고 했을 텐데, 임인규 사장이 전에 30만원 보내준다는 얘기를 했으니, 한국문학상상금으로 30만 원을 보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이정록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이근배 어떻게 하기는 망설임도 없이 임인규 사장에게 달려가서 말했더니, 제게 선뜻 보내 드려라 그러지 않겠어요. 그래서 얼른 보내드렸어요.

 

이정록 – 시만 잘 쓰시고 일만 잘하신 것이 아니라 배짱도 크시고 타인을 돕는 손길도 남다르셨네요

 

이근배 - 1976년 설날 저녁 늦게, 내가 김동리 선생 댁에 세배를 갔어요. 김동리 선생께서 임 사장하고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서 함께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딱 걸린 거예요. 임인규 사장이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더라고요그래서 <한국문학>이 우리 한테 온 거예요그렇게 인수는 했는데 장사가 잘 안되니까 나 한테 떠맡겨, 얼떨결에 내가 맡게 된 겁니다.

 

  © 이정록

 

이정록 - 한국문학 책은 잘 팔리셨나요?

 

이근배 - 김동리 선생 때문에 한국문학』 19766월호부터 198411월호까지 냈는데 서울에서는 한국문학이 가장 많이 나갔다고 해요.

 

이정록 많이 팔리는 책 한국문학을 그때 당시 그만 두셨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으셨는지요. 그리고 그 한국문학을 2023년도인 작년에 저에게 해보라고 샘문그룹 고문단 회의에서 회장님이 샘문고문으로 참석하여 승락을 하셔서 샘문그룹 산하 계열사 <주식회사 한국문학>에서 <한국문학 복간호>를 출간하고 <한국문학상>도 부활하여 공모전을 거쳐 당선자들을 시상하였습니다. 한국문학상 심사는 이근배 회장님이 심사위원장 이셨고, 손해일 이사장님, 김소엽 교수님이 부심사위원장님으로 참여하셨고, 제가 심사위원으로 참여 하였지요. 후속 이야기들을 해주시지요.

 

이근배 - 이 회장 얘기가 맞아요. 내가 해보라고 승낙했지요. 오래전에 내가 조정래 소설가에게 한국문학을 넘길 때 35,000부를 찍었습니다. 영화배우 하길종 감독을 영화인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는데 '이근배 선생님 걱정 마세요. 저는 서점에 가서 한국문학 하고 소리칩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중에 다들 힘들고 자금이 많이 들어가서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휴식기를 가졌었습니다.

 

  © 이정록

 

이정록 – 네 그러셨군요. 기회를 주시고 인정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예술분야에 계신 분들도 책을 많이 읽었군요. 회장님의 저명성 때문인가요?

 

이근배 그것보다는 책의 내용이 영화라든가, 이런 곳에서 빌려 쓸 내용이 많았다는 이야기지요. 내가 <한국문학>에 좋은 소설을 많이 실었더니, 영화감독이라서 자주 본 모양이더군요. 그렇게 김동리 선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나는 처음엔 소설 쓰려고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했다가 미당 선생을 만나 시 쪽으로 돌아섰지만, 김동리, 미당 선생 두 분은 잊을 수 없는 스승님입니다.

 

이정록 소설을 쓰시려고 했다는 새로운 내용에 비하인드 스토리는 처음 알았습니다.

 

이근배 지금 생각해 보면 시로 돌아선 게 잘한 거지요. 김동리 선생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광복 직후에는 신인이었지요. 그런데도 <조선청년문학협회>를 만들고 6.25 이후에는 자기가 주도해서, 물론 형 김범부의 인맥이 있으니까 그랬지만, <대한민국예술원>을 창립했고, <서라벌예술대학>을 세워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예창작과>를 만들었지요.

 

이정록 - 서라벌예술대학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군요. 서라벌예술대학은 지금 중앙대학교 이지요. 그곳 출신들이 지금의 한국문단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더군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정종명 소설가, 감태준 시인, 한분순 시인 등 또한, <대한민국예술원>이 생겨난 것도 알게 되었으니 오늘 대담은 정말 유익한 문단의 자료가 되겠습니다.

 

이근배 -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문예창작과가 1920년에 만들어진 뒤 대한민국에서는 1952년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부심이었지요.

 

이정록 당시 서라벌을 빛냈던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이근배 - 김동리와 서정주입니다. 김동리 선생이 얼마나 꽉 차게 커리큘럼을 짰는지, 홍기삼 평론가가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동국대에 편입해 보니까 싱거워서 못 다니겠다고 그럴 정도였지요. 당시 글 꽤나 쓴다는 사람은 모두 서라벌예술대학 문창과에 강사로 나왔으니까요. 그만큼 김동리 선생의 힘이 장사였어요. 예전에 한국문학가협회하고 자유문학자협회의 통합을 얘기했잖아요. 처음에 의견 조율을 하느라고 전영택 목사가 초대 회장을 하고 박종화 선생이 회장 하던 것을 김동리 선생이 협회장을 이어 받았지요 김동리 선생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습니다그런 분이 계셔서 오늘의 <한국문학>과 <한국문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그 자그마한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참 존경스러운 분이셨어요.

   

이정록 – 예전에 회장님께서 저에게 여러번 박경리 선생님에 관해서 말씀하신적이 있으신데 숨겨져있는 히스토리가 많으신 것 같으시던데 말씀 좀 더 해주시지요.

 

이근배 - 토지는 명작 중에 명작이지요. 토지를 쓰신 박경리 선생의 본명은 박금이(朴今伊)인데, 김동리 선생이 박경리란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박경리 소설가가 1950년대 초 무렵이었을 겁니다. 김동리 선생과 인연이 있어 시를 보여드렸는데, 원고를 보시더니 시는 안 되겠다. 소설을 좀 써 봐라 해서 소설을 써서 김동리 선생께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 이근배 현대문학』 이 창간됐을 때인 1955년에 박금이씨가 <불안지대>라는 소설을 김동리 선생께 보내드렸는 데, 현대문학』 에 추천 되었는데. 박금이씨는 자신의 소설이 추천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 지난 뒤에 누가 현대문학에 당신 작품이 발표됐다고 해서 보니까 소설 제목이 <계산>, 작자는 박경리로 나온 겁니다.

 

▲ 이근배 백시종 소설가는 본명이 백수남 인데요 '시종이라는 이름은 김동리 선생이 본명을 준 겁니다. 시종(始鍾)에서 ()()으로, 발음은 같고 글자만 하나 바꾼 것이지요. 또 한말숙, 이문희, 백인빈, 김춘복 소설가와 나와 동기인 송상옥, 김문수, 이재백, 김주영, 유현종, 백도기, 오찬식 등도 대단했습니다.

 

이정록 회장님과 인맥이 있는 분들이 정말 대단하군요

 

이근배 당시는 인구가 적은 시대이고 문인이 된다는 것은 굉장이 힘들었던 때라 문인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등단을 하려면 추천을 몇 회씩 거쳐야 하는데 그것도 오늘 내일 바로 되는 것이 아니까 몇 년 걸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정록 - 이 분들 가운데 특별한 사연이 있는 작가가 있으신지요?

 

이근배 - 송상옥 소설가는 이어령 평론가가 한국문학의 희망 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소설을 잘 썼지요. 나중에 오정희, 이문구, 이동하, 김원일, 작가도 있고 뿐만 아니라 황석영, 이경자, 정연희, 김소엽, 김지연, 김민숙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이문구 소설가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문구 작가를 정말 존경해요. 김동리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아주 크게 했습니다. 총리까지 나오고 그랬으니까요. 그때 이문구가 조사는 김주영, 조시는 이근배로 정리해서 제가 조시를 읽었잖아요.

 

이정록 그 정도 영향력이 있으신 분이셨군요.

 

이근배 그럼요. 이문구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요. 박정희 시절 그러니까 유신시대 때, ‘김동리가 어용이다' 이런 비판이 나왔어요. <자유실천문인협회>가 만들어지고 유신반대 투쟁을 할 때, 명동성당에 있는 한 강당에서 백낙청, 이호철, 남정현 등을 비롯, 많은 반체제 작가들 앞에서 이문구가 그랬습니다. “김동리는 저희 사부입니다" 라고요. '너희들 김동리 욕하지 마라는 뜻이었지요김동리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첫째 친일을 안 했고, 또 자유당정권 같은 데서도 아무런 협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분이 한 것은 말하자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실천한 것이었지요. 이문구 소설가는 명절이 되면 김동리 댁에 가면서 방문객들을 안내했어요. 김동리 선생을 따르는 큰 어른들이 많았고, 박경리, 박재삼, 이형기, 이호철 등이 있는데도 장례식 때는 김주영과 나를 지목해서 영결식 때 앞에 세웠습니다.

 

  © 이정록

 

이정록 회장님의 고명한 말씀에 귀 기울이다 보니 한국문학의 길을 걸어오신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매우 관심 있고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이곳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니 아쉽지만 여기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해야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예술원회장을 지내셨으니 한국문단의 문학대통령으로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는 자리까지 앉으시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뒤 따르는 후배들에게 덕담 한 마디 해 주시지요. 아울러 문학인의 정신은 이래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근배 - 내 시 가운데 금강산을 길을 묻지 않는다’ 는 시가 있어요. 나는 이 시가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낭송도 많이 하고 그러는데요. 시인이 가는 길, 문인이 가는 길은 금강산을 오르는 듯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분단 후 베일에 가려진 금강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가보고 싶은 명산 아닙니까. 그 명산을 찾아가듯 문학의 길을 걷는 다면 모두가 가슴 설레고 기대에 찬 심정으로 창작을 하실 거라 믿습니다갑집년 새해는 푸른 용띠 해라고 하는데 용이 승천하듯 비상하기를 바랍니다. 용이 오르는 하늘 길에는 막힘이 없잖아요. 새해 소망하는 모든 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 이정록

 

이정록 지금까지 회장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한국문단의 역사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뒤를 따라 걷는 사람으로 또한 시를 쓰고 책을 만들고 문학그룹을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 오늘 말씀은 아마도 제 삶의 가장 큰 보물이 될 것입니다문단 실록의 값진 진주를 캐낸 기쁨으로 인하여 이 시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회장님께 후속적인 문단사를 많이 여쭤보겠습니다. 오늘 샘문그룹에서 주최,주관하는 <한용운문학상> 계관부문 대상을 수상하신 공광규 시인과 손해일 국제PEN한국본부 명예이사장, 김유조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님 등과 같이 훌륭한 분들이 증인이 된 가운데 한국문단 거장이신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오늘의 역사는 훗날 문학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아주 값지게 인용이 되고 회자가 되고 귀감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갑진년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SMN

샘문뉴스, 샘문TV 이정록 발행인, 회장

샘문뉴스, 샘문TV 문화부 신재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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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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