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문학상_등단 - 이상욱 수필가

제 8회 샘터문학상- 수필, 고랫배 전설로 신인문학상 수상 - 이상욱 수필가 (대림대학교 교수, 평교원 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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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기 기자
기사입력 2020-09-19 [12:15]

  

  © 김성기

 

<SAEM NEWS>

 


프로필

      이상욱

경기도 안양시 거주
한양대학원 체육학과 졸업 (이학박사)
대림대학교 스포츠지도학과 교수 (현)
대림대학교 평생교육원 원장 (현)
국제우드볼연맹 (IWbF) 부회장 (현)
국제대학스포츠연맹 우드볼 종목 기술위원
문화체육부 1급 스포츠지도사
대한운동사회 운동사 (스포츠재활)
지역보건의료심의위원회 위원 (현)
(사) 샘문학 자문위원
(사) 샘문인협회 회원
(사) 샘문학신문 회원
사계속시와사진이야기그룹 회원
한국문인그룹 회원
백제문단 회원
송설문학 회원


<수상>
샘터문학상 신인문학상 수상 (시,등단)

샘터문학상 신인문학상 수상 (수필,등단)


<저서>
운동처방론/운동과 건강
운동생리학 외 다수


<공저>
고장난 수레바퀴

태양의 하녀, 꽃
(컨버젼스 시집/샘문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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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랫배 전설

 

                                                          이상욱

 

내 고향 용잠(龍岑 : 울산광역시 남구 소재 경치가 뛰어난 작은 해변마을로 오래 전 울산화학공업단지에 편입되어 사라짐)에는 고래잡이배가 드나들고 선주(船主), 포수, 선장 등 고래잡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국 유일의 고래잡이 마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울산에는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있고 그 암각화에는 각종 고래가 즐비하게 그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 마을에는 고래와 관련된 사람들과 이야기, 물건, 볼거리들이 있었다. 고래를 잡은 날은 동네 잔칫날이 되었다. 밍크 고래에서부터 집채만 한 나가수(흰 수염고래)까지, 고래가 잡히는 날에는 고래를 해부하는 큰 칼잡이 아저씨, 작은 칼잡이 아저씨가 고랫등에 올라 있고, 동네 사람들은 이 대단한 구경거리에 모여 들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한 점의 고깃덩어리를 얻을 요량으로 한 손에는 고기 담을 그릇이 쥐어져 있었다.

고래 잡은 날 동생과 어머니가 바로 그런 광경을 뒤로한 채 찍은 사진이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고래 크기나 고랫배 크기가 비슷해 보여 어림잡아 어느 쪽이 큰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울산은 한창 석유화학단지 조성으로 인해 내 고향 용잠은 매연이 심해져 더 이상 살 수 없는 철거지역이 되어 도회지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천혜의 비경이었던 용잠 해변은 사라지고 어린 나이에 실향민이 되었다. 이때 사귀어 40여 년간 죽마고우로 지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처음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무척 낯설게 느꼈다고 한다. 내가 마치 딴 세상이나 이북에서나 온 사람처럼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고래가 얼마나 크지, 고랫배가 고래 크기와 비슷하다는 사실조차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래를 물고기 잡듯이 고랫배에서 잡아 올려 바로 해체하거나 냉동한 다음 고랫배에 싣고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이들을 말로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것도 아마도 이때부터 터득하게 된 것으로 기억된다. 고랫배 뱃머리에는 고래를 발견하기 위해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망루가 높이 솟아 있고 올라가는 줄사다리와 그 아래에는 고래를 잡을 때 사용하는 포(작살포)가 있다는 것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망루에서 고래를 발견하면 고래의 위치를 포수와 선장에게 알리고 포수의 지시에 따라 고랫배는 고래를 쫓아간다. 포수는 유효 사격거리 내에서 고래가 물 밖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포를 쏘아 명중시킨다.

포수가 쏜 작살(길이 1.5m 정도, 직경 70mm 쇠막대로 작살 앞쪽 끝은 우산대처럼 펴지는 구조로 낚시 바늘의 미늘 역할을 함) 뒤쪽 끝에는 굵은 밧줄이 연결되어 있어 포로 쏜 작살에 밧줄이 낚싯줄 풀려나가듯이 허공을 가르며 풀려나간다. 포로 쏜 엄청난 크기의 작살이 고래 몸통에 박히게 되면 고래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위기를 필사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물속 깊숙이 달아난다. 이때 잠시라도 방심하게 되어 고래의 도주경로로 뱃머리를 대지 못하면 고래가 끄는 힘에 의해 고랫배가 바다 속으로 침몰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노련한 포수는 작살 끝에 연결된 밧줄을 천천히 풀어가며 고래를 따라가다가 고래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거대한 고래도 몸속에 어마한 크기의 작살이 박힌 채 움직일수록 심한 출혈로 오래 버틸 수가 없게 된다. 이를 놓치지 않고 더욱 조여드는 올가미처럼 포수는 천천히 작살에 연결된 밧줄을 기계장치로 감기 시작한다. 고래의 저항이 심하면 다시 밧줄을 풀었다가 감기를 반복해가며 고래 뒷심 빼기를 능수능란하게 한다. 이때 포수와 선장, 갑판 위에 있는 선원, 기관실에 있는 선원까지도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집채만 한 고래를 잡을 수 있다. 숨 쉬는 것조차도 잊은 듯 모두 바다 속의 고래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래의 저항은 점차 줄어들고 마지막 사투를 강력한 꼬리지느러미로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바다 표면으로 떠오르는 고래의 형체가 희끗 희끗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심한 출혈로 힘이 빠진데다가 고랫배의 강력한 엔진의 출력으로 고래가 저항하는 힘 반대방향으로 배를 몰아가며 밧줄을 더욱 세차게 감는다. 밧줄 감기는 기계 소리와 집중력에 고랫배 선원들의 온몸에는 땀이 맺혀 흐른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바다의 왕자, 고래는 고랫배에 단단히 붙은 따개비(갯바위나 배 밑에 붙어 있는 굴 같은 갑각류)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이윽고 고랫배 선원들은 일제히 함성과 환호성을 내뱉는다.

군악대 수자폰 소리보다 훨씬 묵직한 뱃고동 소리를 길게 내며 용잠 포구로 뱃머리를 돌린다. 고래를 잡았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일종의 자축 신호인 것이다.

 

이렇게 잡은 고래를 두고 제일 좋은 부위는 선주, 포수, 선장 순으로 가져가고 고랫배의 뱃사람 서열에 따라 그 다음 순으로 시식을 할 수 있게 진행된다. 아버지는 예전에 고랫배를 잠시 타신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한 경력, 그때의 친분으로 인해 고랫배에서 내려왔어도 우리 가족은 늘 좋은 부위의 고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고랫배를 타는 것은 또 다른 인센티브가 있었다. 농사일을 하거나 다른 고깃배를 타는 것보다 보다 수입이 좋았고

고래를 잡는 날이면 고래 고기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는 고랫배 선원이 최상의 직업군에 속했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내용이지만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 TV가 없었던 터라 TV를 샀으면 하는 마음에 아버지께 고랫배를 타라고 그렇게 졸랐다고 한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에 TV는 고랫배 선주인 목이 아저씨 집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드라마를 목이 아저씨네 TV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그 가족들이 맨 앞에서 보고 가까운 친분 순으로 앉을 수 있었다. 목이 아저씨네 가족들에게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앞으로 그 재밌는 드라마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그 집 아이에게 조차도 조심조심 대했던 기억이 난다.

어렴풋하게 기억되지만 입담 좋은 동네 아저씨, 유난히 나를 귀여워해주었던 동네 삼촌들, 동네 어귀의 점빵(가게)에 들려 댓병 소주를 따라 잔술을 드시던 아저씨들...

아직도 욱아! 단디해라뿜어내는 담배연기에 섞인 굵고 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래의 맛은 천 가지라고 한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늘 들어왔던 말이다. 그만큼 다양한 맛을 낸다는 뜻일 게다. 용잠 해변에서 자라온 나는 고래 고기의 맛이 입에 베여 있었다. 고래 특유의 맛을 즐기게 되었고 찾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중학교 친구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어머니는 낯선 친구를 집에 데려오자 신경이 쓰였는지 저녁 메뉴로 탕수육을 해주셨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탕수육을 배불리 먹고 나자 친구도 잘 먹었는지 맛이 있었는지 물어보게 되었다. “너그집(경상도 방언: 너희집) 탕수육 고기 맛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 친구 이야기를 듣고서야 중화요리 탕수육은 돼지고기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에 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늘 해주시던 육회, 고기무국의 재료도 모두 고래 고기였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마도로스가 지니고 다닌다는 고래 이빨로 만든 담배 파이프를 들고 오셨다. ‘마꼬(경상도 방언: 궐련)’라고 했다. 담배 니코틴이 베어들어 고급스럽게 노르스럼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마꼬가 더욱 노르스럼한 빛깔을 띨수록 마도로스의 연륜도 가늠하게 된다고 하셨다. 이 마꼬로 인장(印章)도 새기기도 했다는데 어린 나도 단박에 귀한 물건임을 알아채어 언젠가는 마꼬 도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은 포경(捕鯨)이 금지된 지 40여년이 흘렀고 고래잡이에 종사하던 사람과 고랫배는 없어진지 오래다. 다만 고래잡이의 흔적을 장생포 고래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도 고래박물관을 몇 번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 고랫배의 진한 추억이 아직 맴돌고 있다. 이런 향수를 알고 울산광역시에서는 행정부서로 고래과()를 신설하였고 고래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시기를 잡아 고래투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서 고래를 선사시대부터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고래잡이를 하며 살았던 삶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 용잠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고랫배와 고래잡이 도구가 발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때부터 이미 용잠 사람들은 고래 잡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엄청나게 큰 고래를 혼자나 몇몇이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협력해야만 고래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잡은 고래를 뭍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동네사람들이 동원되었던 이런 이유여서인지 용잠 사람들은 유난히 유대와 우애가 좋았고 힘이 셌다. 나도 유년시절부터 힘이 유난히 셌다. 고래를 잡았던 용잠 사람들의 후예인데다 해상실크로드의 끝자락 세죽(細竹 : 용잠 근처의 지명으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국제항구)에 정착한 처용(處容: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49대 왕 헌강왕 때 인물로 아라비아 상인으로 추측됨)의 피가 혹시 조금 섞였는지 스스로 의심을 해보기도 한다. 나의 죽마고우조차도 그 힘의 원천을 고래 고기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무엇을 먹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많은 추억을 간직한 고랫배. 내 고향 용잠 사람들은 고래잡이배를 고랫배라 추억한다. 하지만 고래를 접해 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디어나 도서에서 접한 언어, 포경선(捕鯨船)이라 부른다.

오늘밤 꿈속에서 고랫배를 소환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죽마고우들과 함께 용잠에서 푸른 바다로 나가 물 반()고래 반() 고래들의 물놀이 향연을 지켜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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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기

▲ ©김성기

▲ ©장지연 기자

▲ ©김성기


 

 

《SAMMOON NEWS》

 

발행인 이 정 록 회장

편집본부장 조기홍 기자
취재본부장 오연복 기자
보도본부장 김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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